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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조선 하층민의 생존식, 피죽이란

by 지새는 달 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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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죽

조선 하층민의 생존식, 피죽(나무껍질죽) 이야기

나무껍질까지 먹었다? 가난이 만든 생존의 음식

조선시대 하층민들은 잦은 흉년과 기근 속에서
정상적인 식자재가 아닌 자연의 뿌리, 껍질, 풀 등 비식용 자원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중 가장 극단적인 생존식이자 당시 민중의 현실을 가장 뼈아프게 보여주는 음식이 바로 피죽입니다.
이 글에서는 피죽이 만들어진 배경, 조리법, 사회적 의미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피죽'은 어떤 음식이었나?

피죽은 나무껍질을 삶아 만든 죽 형태의 음식으로,
쌀, 보리 등 곡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근기,
혹은 생계가 어려운 하층민이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한 음식입니다.

여기서 ‘피’는 나무껍질, 특히 소나무나 가죽나무(회화나무)의 내피층을 뜻합니다.
겉껍질을 벗긴 뒤 안쪽의 부드러운 속껍질을 긁어낸 뒤 물에 여러 차례 삶고
잡곡이나 도토리 가루, 또는 그냥 물과 함께 죽으로 끓여냈습니다.


왜 나무껍질을 먹게 되었을까?

피죽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음식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환경적 조건이 맞물려 나타났습니다.

원인 설명
잦은 흉년 조선 후기에는 기후 이상으로 대흉년이 자주 발생함
세금과 부역 곡물 수탈로 일반 백성의 식량이 바닥남
전쟁과 전염병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이후 기근이 만성화됨

이처럼 자연과 사회 구조 모두 하층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그 결과 먹을 수 없는 것까지 먹는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피죽의 조리 과정은 어땠을까?

나무껍질을 식재료로 사용하기까지는 복잡하고 고된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굳은 땅을 파, 뿌리 깊은 나무를 베고,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긁고,
그것을 삶고 말려 도토리 가루처럼 곱게 갈아 죽으로 끓였다"

삶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독성을 줄일 수 있었고,
썼던 맛을 줄이기 위해 들기름이나 된장국물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맛을 내기 위한 소금조차 귀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먹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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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죽을 먹는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백성들에게 피죽은 부끄럽고도 절박한 음식이었습니다.
왕조실록과 각종 야사, 민요 등에서 피죽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굶주림의 상징"이자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는 소재"였습니다.

"벼슬아치들이 과거시험을 치를 때, 굶주린 백성들은 피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백성의 삶과 조정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피죽을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과 아이, 노인 등 생계에서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피죽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오늘날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피죽은 단지 비참한 음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분투의 상징입니다.
그 안에는 공급 불균형, 권력 구조, 생태적 지혜
현대 사회가 배워야 할 수많은 시사점이 녹아 있습니다.

조선의 피죽은 굶주림을 견디는 방식이자, 생명을 이어간 고통의 유산이었습니다.
그 가치를 다시 보는 일은, 우리가 현재의 식탁을 더 겸손하게 바라보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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